현대팀
김록수 / 이수혁 / 최정수
with 청관 @GG_adductor
마른 기침이 입가를 데웠다. 피로 물든 입가에 또 한 번 비릿한 액체가 터져 나왔다. 죽기 직전 상태의 동료들, 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날뛰는 괴물들. 무너지는 건물과 시도 때도 없이 귓가를 때리는 굉음. 그 모두가 거슬렸지만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이 모든 것들이 점차 흐릿해져 간다는 사실이었다. 감이 좋은 이수혁은 직감했다.
나 오늘 죽는구나.
사람은 죽기 직전에 생각이 많아진다고 하던가?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든 많은 생각에 대한 사담을 좀 하려고 한다. 사실 전직 백수, 현직 능력자 길드의 1팀장 이수혁은 배우가 되고 싶었다. 뭐, 거창한 이유는 없었던 것 같다. 일단 멋있었고, 돈을 많이 벌 수 있었으며. 간접적으로나마 많은 생을 살아볼 수 있었으니까. 그런 이유로 그는 배우를 꿈꾸었다. 물론 현실의 벽은 높았고. 그 만큼이나, 혹은 그 보다 더한 재능을 품은 사람이 넘쳐났으며. 세상이 무너진 이후에는 이룰 수 없는 것이 되었지만 그래도 한때 꿈꾸었던 직업은 오래간 제 마음에 남아 있었다. 심하게는 아니고 그냥, 그땐 그게 하고 싶었지. 그런 걸 원했었지. 딱 그 정도? 그 이상의 미련은 없었다. 그냥 문득문득 어르신들이 젊었을 적을 회상하듯 종종 생각이 났을 뿐이다. 그리고 나이가 들었을 때의 이수혁은 재빨리 꿈을 농부로 바꾸었다. 그래, 세상이 이지경인데 배우는 좀 그렇고 밥이라도 잘 먹고 다니게 농부를 해야지.
세상은 의외로 살만한 곳이었다. 한 번 무너지고 다시 세워졌지만 여전히 그랬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우친 사람들은 무리를 이루었고,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다독였으며. 돕고 구해지기를 반복하며 발전을 이루었다. ‘능력자’라는 이들이 생겨난 이후에도 그랬다. 힘이 있는 이들은 다른 힘이 있는 이들을 경계해 교만하지 않았고, 힘이 없는 이들은 힘이 있는 이들을 의식해 무모하게 굴지 않았다. 이수혁은 어렵지 않게 그들 무리에 섞여 들어 돕고 구해지며 살아갔다.
여러 개의 능력을 개화한 후. 적당히 사람다운 일을 할 수 있으면서도 인정받는 위치, 싸가지 없고 귀여운 후배들을 들였을 때는 운이 좋았다는 생각을 했다. 솔직히 인생 살면서 한 80년 전쯤 태어나 살다 죽었으면 이 괴물 새끼들 안 봐도 됐을 텐데, 하는 푸념을 안 해본 건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그래. 이 정도면 난 참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닌가 하고 만족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말 것도 없었다. 그는 제 선 밖의 이들의 불행을 재어 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자신의 상황에 완벽히 타협한 상태였다.
하지만 세상이란 놈은 만만치지 않다. 그간 답지 않게 부지런하게 살았건만 이렇게 젊은 나이에 요절하게 만들다니. 그 것도 저보다 더 창창한 놈과 함께.
짧게 숨을 내쉬며 이수혁은 옅어지는 제 숨과 후배 직원 최정수의 숨. 그리고 낙담한 김록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래. 너희랑 추억이 많았지. 그런데 이렇게 끝이네. …솔직히 좀 많이 아쉽지만. 아, 나 진짜 배우도 못 하고 농부도 못 하고…. 서러움을 가득 담아 짧게 숨을 내쉬자 흐느낌에 가까운 목소리가 다가왔다. 잘 들리진 않았지만 대충 제 생각과 비슷한 말이었다. 다들 배우도 농부도 못 하고…. 사는 게 최고라는 말도 못 지키고! 발음이 흐린 그 말들은 원망이었지만 동료애였고, 가족애였다. 그리고 그는 문득 이 비현실적이고 말도 안 되는, 비참하고 서글프지만 마냥 아프지만은 않은 상황을 보며. 생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을 했다. 머리가 울리고 의식이 흐려서 순간 말도 안 되는 개논리를 말이 된다고 믿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그래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왜 영화를 만들었을까?
심심한 인생에 불만이 있어서? 데이트 가려는데 갈만한 곳이 없어서? 좀 예쁜 얼굴들을 크게 보고 싶어서? 그것도 맞긴 한데. 내가 갑자기 든 생각인데 말이야. 영화 속에서처럼 비현실적이고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부딪혔을 때. 말도 안 된다며 회피하지 말라고. 그냥 내가 주인공인 어떤 영화가 있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이라고. 그냥 그렇게 시작했고, 고난이 닥쳤고. 해결하거나 그러지 못했으며. 그렇게 끝이 났다고. 그리고 그 끝을 기억하는 너희가 있어 한 사람의 이야기가 영화가 되었다고.
…그러니까, 이 모든 사람들처럼 너도 그럴 수 있다고.
이런 일이 생긴다고 해도 당황하지 말라고.
미리 주인공의 삶을 학습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록수야, 김록수야.
…지?
넌, 살겠지? 다른 팀 팀원들도 결국엔 살아남겠지? 살아서 우리를 기억해 주겠지? 언제까지고는 아니라 해도 나를 알고 나랑 아는 사이인 쟤를 알고. 후배인 정수와 너를 알고. 그리고 그 상태로 시간이 지나도 이수혁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겠지? 내가 살았고, 살아서 고난을 만났고. 해결하거나 그러지 못했으며. 소중한 동료인 최정수와 그렇게 끝이 났다는 사실을. 그리고 너는….
짧지만 긴 사담이 끝나며 이수혁의 눈꺼풀이 닫혔다.
죽기 직전의 이수혁은 자신이 이미 한가지 꿈을 이루었음을 깨달았다.
아, 하지만 역시 사는 게 최고다.
끝까지 그는 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