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홍
with 냐챠 @nyacha_cha
어느 겨울의 새벽, 온은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가볍게 기지개를 켜고 침대에서 일어나 보니 케일과 몸을 둥글게 말고 자는 동생들이 보였다.
새삼스럽지만, 온은 이 풍경이 당연해졌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잠시 제 가족을 지켜보던 온은 창가로 다가가서 밤사이 눈이 내려 하얗게 물든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아마 동생들이 깨어나면 밖에 나가 놀자고 말할 테고, 케일은 내키진 않겠지만 따라나서 줄 것이다. 작년에도 그랬듯이 말이다. 잠시 뒤 깨어난 홍과 라온은 온의 예상대로 새하얀 눈밭을 보며 눈을 빛냈다.
“눈이 엄청 많이 왔다!”
“밖에서 놀면 재밌을 것 같은데!”
신난 홍과 라온은 케일이 깨지 않게 작은 소리로 대화하며 창가를 빙글빙글 돌아다녔다. 온은 그 주변에 앉아 둘이 늘여놓는 계획에 의견을 덧붙이거나 맞장구를 쳤다. 눈 때문에 평소와 공기가 달라져서인지, 작게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서인지 케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났다. 이내 케일이 잠에서 완전히 깨자 셋은 케일에게 밖에 나가서 놀자고 말했고, 케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온은 눈밭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발자국을 남기는 동생들을 보다가, 덤불에 쌓인 눈을 만졌다. 부드러울 것 같은 생김새와 달리 손끝엔 차가움만이 느껴졌다. 냉기에 붉어진 손가락을 보며 온은 문득 홍과 단둘이 도망 다녔던 날들을 떠올렸다. 겨울이라 눈이 내렸었고, 털옷도 장갑도 없어 내내 손이 붉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때의 눈은 지금의 눈과는 무게와 온도가 달랐다. 그 눈은 아주 시리고, 무거웠다. 그런 눈에 더해진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변변찮은 음식도 못 먹어 주린 배는 온을 더 춥게 만들곤 했다. 제 손이 닿자 녹아버리는 눈을 보며 온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지금의 온은 눈이 내려도 불안하지도 걱정되지도 않았다. 그저 눈이 온다고 생각할 뿐. 차가워진 손을 반대 손으로 감싸고 홍과 라온을 따라가려 발을 뗀 순간, 어깨에 무언가가 살짝 걸쳐졌다.
“장갑 끼고 놀아.”
케일이 내민 장갑을 건네받자 이내 투박한 손길이 머리에 닿았다. 겉보기엔 머리를 쓰다듬는 건지 건드리는 건지 모를 그 손길에, 온은 왠지 웃음이 나왔다. 그 계절, 온과 홍의 능력은 날이 갈수록 강해졌다. 서로를 지켜야 했고 살아남아야 했으므로 힘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독안개를 더 짙고 넓게 펼쳐 숨어야 했다. 항상 추적이 따라 붙었을까 두려워 숨도 편히 내쉬지 못할 만큼 긴장했으며, 편히 잠들지도 못했다. 혹여나 뒤를 쫓는 듯한 소리가 들릴 때면 온은 반사적으로 홍을 제 등 뒤로 감추었다. 작은 등이었지만 동생을 감추기엔 충분했기에. 어린 남매에게 세 살 차이는 꽤 컸고 온은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보호자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온은 저를 쳐다보던 홍의 눈빛을 기억한다. 이제는 케일을 향해 있는 그 눈빛을. 장갑을 낀 후, 온은 고개를 돌려 제 보호자를 바라보았다. 제 눈빛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온은 자신이 지금 홍의 눈빛과 닮은 생각을 눈에 비추고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고맙다는 건데.”
살짝 고개를 숙인 온은 케일에게 들리지 않게 작게 웅얼거렸다. 단순히 장갑을 챙겨줘서 하는 말이 아닌, 여러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이제 온은 어린아이여도 괜찮다. 보호자가 아닌 그저 누나로서 홍과 지낼 수 있다. 사방이 적의로 가득했던 작은 지옥에서 도망쳐, 우연히 케일을 만났기에 가능해진 일이었다. 그래서, 고마웠다.
온은 생각을 멈추고, 홍에게로 걸어가 얼굴이 눌릴 만큼 꼭 끌어안아 준 다음 라온도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활짝 웃었다. 어린아이다운 미소였다.
라온과 함께 눈사람을 만들던 홍은 온이 갑작스레 끌어안자 화들짝 놀랐다. 홍은 금빛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볼이 살짝 눌린 채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숨 막힌다!”
같이 붙잡힌 라온도 당황했는지 목소리가 대화할 때보다 커졌다. 둘은 자신들을 끌어안고 활짝 웃는 온을 보고는 따라 웃었다. 누나도 신났나? 눈을 도르륵 굴리던 홍은 온의 손을 잡아 와선 같이 눈사람의 몸통 부분을 굴리기 시작했다.
홍은 어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른이 된 후 돌이켜보면 기억도 잘 나지 않는 나이인 여섯 살. 그 어린 나이에 홍은 살아남기 위해 도망쳐야 했다. 도망칠 때 홍은 항상 온의 등을 보았다. 저를 등 뒤에 감추고 지키려 하는 누나를 조금 의지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의지했다. 그것이 온에게 부담이 될지 기꺼울지 모른 채 홍은 온의 뒤를 쫓았다. 남매는 어렸지만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렇게 이리저리 추적을 피하다 도착한 곳이 헤니투스 영지였고 어느새 봄이 찾아와 있었다. 그 어느 겨울보다 차디 찼던 겨울을 지나 맞이한 봄에, 케일과 온, 홍은 만났다. 온은 케일을 경계했지만 홍은 그의 호의에 반응했다. 케일은 빵을 주겠다더니 고기랑 케이크를 챙겨줬다. 누가 봐도 미리 준비해온 구성의 음식이었다. 홍은 그 행동에 저도 모르게 작은 희망을 품었고, 그 희망은 이루어졌다. 이제 홍에겐 동생이 있으며 든든한 보호자도 있다. 그 속에서 홍의 불안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인간아, 눈사람 완성이다!”
온과 홍, 라온의 합작으로 거대한 눈사람이 완성되었다. 홍은 눈사람을 칭찬하며 차가워진 라온의 뺨을 두 손으로 잡는 케일과 제 옆에 있는 온을 번갈아 보았다. 라온과 온이 케일을 보며 활짝 웃고 있어 홍도 같이 웃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홍의 소중한 가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