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하나
with 건강주스 @rjsrkdwntm
제국의 꽃
제국은 그날 이후로 다시는 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역사서에 기록되기 위한 공식적인 명칭은 따로 있었지만 많은 이들은 그날을 '해방일'이라고 불렀다. 이는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말이었다. 해방. 잭은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발코니 너머 정원에서 눈을 돌려, 바깥 풍경에는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하게 과자를 집어 먹는 하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손은 변함없이 검은 거미줄이 달라붙은 듯 끔찍한 형상이었지만 하나가 무엇에도 얽혀있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잭은 종종 깨진 손거울을 품에 안고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는 풀려났고, 자유롭기에 지금 이 하늘 아래에 있을 수 있다.
자유에는 책임, 즉 일거리가 딸려오는 법이다. 달라진 제국은 한때 기사였던 붉은 머리의 새 지도자를 축으로 삼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덜컹거리는 길 위에서 잭은 많은 이들이 바라보며 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고, 하나는 그 방해자들에게 기척 없는 안식을 선물했다. 각자의 일로 바빠 서로 얼굴 마주할 기회도 마땅치 않은 쌍둥이가 휴식을 취하는 순간에 끼어드는 이는 없었다. 심하게는 신성모독으로 여기는 것 같다며 하나가 코웃음 치기도 했다. 신성은 무슨. 죽으면 다 똑같지.
그러나 오늘은 그 ‘신성모독’이 일어났고 잭의 눈이 동그래졌다. 평소 두 사람을 찾아올 일이 없던 시종장이 본 적 없는 상자까지 들고 오니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제국은 아직 불안하다. 큰일이라도 난 것일까? 팽팽하게 긴장을 당긴 하나의 눈빛에 시종장이 압도되는 기색을 보였지만, 그는 곧 연륜 있게 침착을 되찾고 손에 든 상자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용건은 시답잖았다. 시종장은 곧 열릴 해방일 기념행사에서 두 사람이 앉을 좌석을 어떻게 장식할지를 물어보러 왔을 뿐이었다. 긴장이 무색해지니 몸이 흐늘흐늘하게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간 제국의 가장 큰 국경일은 건국일이었지만, 많은 이들은 새로 맞은 두 번째 시작의 날을 더 기다렸다. 그만큼 기념행사 역시 공들여 준비되었고 쌍둥이 역시 흔쾌히 필요한 몫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사소한 부분 정도는 알아서 하라고 맡기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하나가 눈에 띄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 게 왜 중요한데. 시종장은 주눅 들지 않고 착실히 대답했다. 두 분이 같이 계실 때가 많지 않아 부득이하게 지금 의견을 여쭈어보러 왔습니다. 쌍둥이의 눈이 마주치고 다시 짧은 한숨이 공유되었다. 한꺼번에 모든 것이 바뀌지는 않는다. 제국은 역사가 긴 만큼 전해져 오는 것들도 많았다. 황궁 예법은 원로 예학자 세 사람은 있어야 하나로 완성될 만큼 양이 많고 복잡했고, 그 어딘가에는 태양신 교황을 대우하는 방법 따위가 들어 있어서 ‘쓸모없고 귀찮은 일’에는 관심이 없는 두 사람을 괴롭게 했다. 듣는 척도 하지 않는 하나와 웃는 얼굴로 전부 거절하는 잭 덕분에 적지 않은 양이 쓰레기통으로 보내졌지만, 많은 이들이 기대하는 큰 행사의 절차를 갑자기 변화시키기는 쉽지 않았다. 잭이 눈으로 신호하자 시종장이 상자를 열고 조심스럽게 내용물을 꺼냈다.
진귀한 보석을 박아 화려하게 세공된 보관, 목에 걸면 고꾸라질 듯이 무거운 목걸이, 장갑 위에 끼도록 만들어진 커다란 반지… 상자 안에서 쏟아져 나온 보물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금으로 만든 꽃이었다. 황금을 얇게 펴 만든 꽃잎을 섬세하게 겹쳐 만들어낸 조화에는 잎사귀 주름까지 섬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하나가 꽃을 집어 들었다. 이건 뭐야? 떨떠름한 두 사람의 반응에 기운을 잃었던 시종장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태양을 의미하는 황금과 생명을 상징하는 꽃을 합쳐서 표현한 몇백 년 전의 역작인데, 예시로 하나만 가져왔을 뿐 좌석을 꾸미기에 충분한 양이 보물고 안에 보관되어 있다고 했다. 살아있는 꽃으로 착각할 만큼 절묘하고 아름다운 조화는 오랜 시간 사랑받은 덕에 완벽한 형태를 유지하며 제국과 역사를 같이 해왔다. 역대 교황들은 절대 시들지 않는 영원의 황금꽃을 장식함으로써 신의 권위를 드러내고 그 은혜를…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금꽃은 탁자로 돌아갔다. 하나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올려보자 잭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시종장에게 답을 전했다.
가져오고 설명하느라 고생했지만, 우리는 그냥, 꽃 정도만 장식해주면 좋겠어요. 이것들은 전부 다 너무 무거워 보이네요.
답을 얻은 시종장은 조심스럽게 보물을 상자에 넣었다. 하나하나가 귀한 물건이기에 부드러운 천에 감싸 상자에 다시 넣는 데에도 꽤 시간이 걸렸다. 시종장은 올 때처럼 상자를 안아 들고 미소 지었다.
그러면 황금꽃만을 장식하길 원하신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 아니지.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시종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 짧은 대화에서 뭘 놓친 것인가?
그냥 꽃을 장식해줬으면 좋겠어요. 그 황금꽃 말고요.
설명이 덧붙여졌지만 시종장은 여전히 의문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잭이 한 번 더 강조해서 말하자 시종장은 그게 정말로 그들의 뜻임을 알았다. 방을 나와 돌아가는 길에 계속 의문이 남았다. 쌍둥이가 말하는 꽃은 살아있는 꽃이었다. 물론 생화를 장식해도 아름다울 것이다. 그러나 황금꽃은 정말 큰 행사가 아니면 교황조차도 손대지 않았던 귀한 보물이다. 그간의 교황들은 보관, 목걸이, 그리고 황금꽃을 남들 앞에 드러내며 소유주가 자신임을 과시했다. 사람이 바뀌어도 이 과정만은 늘 같았고 해가 거듭될수록 표정도 다들 비슷해졌다. 교황이 영원한 신의 대리자라는 말은 어쩌면 이런 의미일지도 몰랐다. 시종장은 이제는 인간으로 돌아간, 지난 '대리자'를 떠올렸다. 앞으로 충실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는 정해져 있지 않은가. 자신은 뜻을 따를 뿐이다.
그렇게 해방일 기념행사가 열리는 아침이 되었을 때, 계절 꽃으로 가득 찬 제단은 향긋했다. 잭의 말을 어떻게 이해한 것인지 제단 위에 아예 화단을 만들어놓은 시종장 덕에 가까운 울타리까지 모두 꽃으로 뒤덮여있었다. 보호자의 품에 안겨 구경을 나온 어린아이들이 너도나도 손을 뻗어 한 송이를 뜯어가지 못해 안달을 냈다. 병사들은 아이가 울지 않을 정도로만 말리며 서로 난감한 웃음을 교환했다.
조금 많다는 평을 듣긴 했지만 시종장은 자신의 욕심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았다. 제단 위로 몸을 드러낸 쌍둥이가 환하게 웃는 모습에는 생기가 넘쳤다. 붉고 푸른 물결 위에 선 성자와 성녀 머리 위로 황금과 같은 색의 화관이 올려졌다. 하나가 검게 얽힌 손으로 화동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어린 화동은 통통한 뺨을 발갛게 물들이며 환히 웃었다. 시종장은 보석과 금으로 치장되는 축제 풍경은 앞으로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순간의 웃음, 내일이면 질 꽃, 찰나에 반짝이는 것들로 채워진 시간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축제가 진행되며 제단 위의 두 사람에게는 교묘한 고요가 찾아왔다. 하나가 꺾인 꽃 한 송이를 찾아내 잭에게 건넸다. 손끝이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꽃을 건네받은 잭이 꽃잎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꺾이며 다친 꽃은 이미 시들어가고 있었다. 내일이면 완전히 생명을 잃고 말라비틀어질 것이다. 아쉽지만 두 사람의 선택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도망친 뒤 다시 살기 위해 제국 땅을 밟을 때, 이 견고한 영원을 부수고 연약한 지금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 만들어진 보물은 타인의 손을 빌려야만 몸을 빛내고 형태를 유지할 수 있지만 살아있는 꽃은 스스로 씨를 퍼뜨리고 닿은 자리에 뿌리를 내린다. 그저 누군가에게 꺼내질 날을 기다리는 몸이 되지 않겠다. 이 땅의 어디까지고 뻗어나가 피어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다치더라도 상처를 서로 돌볼 것이고 져버린 뒤의 상실 또한 함께 견딜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돌아왔기에.
잭과 하나가 서로를 마주 보고 웃었다. 우리는 지금을 살아가고 내일 다시 새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