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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크&로잘린

with 아타카 @ataja277

 라크에게는 항상 누군가에게 걸음을 맞춰주는 습관이 있었다. 제 후리후리하고 큰 키와 보폭이 넓은 탓에 웬만한 이들은 제 걸음을 따라오지 못하는 이들이 대다수이기도 했고, 자신이 누군가와 나란히 걸음을 맞춰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던 탓이었다. 그런 습관은 가족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창 사이로 손을 내뻗은 햇빛이 나선 계단에 손자국을 남겼다. 나선 계단은 끝을 모르고 하늘로 뻗어 올라가 일견 나팔꽃의 넝쿨을 연상케 했다. 나선 계단의 끝에는 실제로도 마탑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탑주의 방이 있었다. 그런 나선 계단 위로 두 발걸음 소리가 나란하게 툭, 툭 떨어졌다.

 “탑주의 방이 정말 높긴 높구나.”

 “운동을 위해서든 비행마법 실력 향상을 위해서든 정말 쓸데없이 높지. 아무리 상징성 때문이라지만 왜 매번 탑주의 방은 꼭대기 층인지 몰라.”

 “지난번엔 방해 안 받고 조용해서 좋다지 않았어?”

 “막상 거기서 살아보니 꼭대기 층만의 고충이란 것이 있더구나.”

 

 로잘린은 농담처럼 생긋 웃었다. 라크도 말만 저럴 뿐 로잘린이 탑주의 방 위치에 관해 별다른 불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본인부터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마법사이기에 생활의 불편함 정도는 마법으로 해결할 수 있던 것이다. 갓 마탑이 지어졌을 즈음 로잘린이 온갖 마도구와 장치들을 개발하며 호쾌하게 미친 웃음을 터뜨리던 것을 기억하는 라크로서는 그저 웃음만 나올 따름이었다. 그 마도구와 장치들은 지금 탑주의 방에서 온갖 편의를 제공하는 중이었기에 더더욱.

 실상 지금 이렇듯 나선 계단을 빙글빙글 돌아 올라가는 것은 순전히 로잘린이 걷고 싶다는 이유로 시작된 것이었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는 일도 없이 나란한 걸음들이 나선 계단을 울린다. 희게 그림자지는 햇빛의 손자국 위로 다시 한 번 그림자가 드리운다. 로잘린은 일정하게 울리는 발소리를 듣다 말했다.

 

 “가만 보면 너 걸음 보조 잘 맞추네.”

 “아 응. 다른 사람들이 나 걷는 거 못 따라오고 그럴 때가 좀 있어서.”

 “키 크다고 은근슬쩍 자랑하는 것 좀 봐. 누나 키 좀 떼줄래?”

 “마법으로 키를 늘였다 줄였다 하는 건 못해?”

 “글쎄다? 지금부터 연구해보면 되지 않을까. 이러다 사람의 성장과 마법에 관한 논문이 하나 나올지도 모르지.”

 “그럴 듯 한걸.”

 

 의남매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키들키들 웃었다.

 

 “어쨌든 너무 맞춰주고 그러지 마. 가끔 네가 흐름을 이끌어야 할 때도 있는 걸.”

 “갑자기 무슨 소리야, 누나?”

 “그냥. 예전에 발걸음 보조 맞춰주는 사람은 다른 사람 성격도 잘 맞춰준단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거든.”

 “그렇다면 걱정 마. 누나. 나 이제 어디 던져놔도 안 빠질 돌격대장인걸?”

 “잘 알지, 그럼.”

 “그리고 나는 맞춰주는 게 좋은 것 같아.”

 “뭐가?”

 “나 어릴 적에는 남들보다 느렸잖아.”

 

 어렸던 자신은 소심했고, 겁도 많았으며, 가진 힘조차 제대로 쓸 줄 모르던 거북이였다. 어릴 적에는 그것이 참 서러웠더라. 남들도, 제 가족들도 이미 저만치 앞으로 달려 나가 각자의 삶과 맞서 싸우고 있건만, 자신은 느렸고, 뒤쪽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도 분했다. 한눈팔면 저만치 앞서나가 달리는 이들을 따라잡으려면 라크는 그보다 배가 되는 시간이 필요했다. 거북이는 한 발 한 발 느리게 뻗으며 생각했다. 누군가 곁에서 같이 걸음을 맞춰주고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다정하고 상냥한 제 가족들은 느린 걸음에 신경 쓰지 않고 기다려 주었지만, 그래도 이끌어주기보단 곁에서 같이 걸어가 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노라고.

 

 “너다운 이유네.”

 “그렇지? 나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누나랑 최한 형 되게 멋있고 부러웠거든. 등만 보면서 쫓아가기도 벅찰 정도로.”

 “그래? 난 네가 멋져 보이는데.”

 “엥, 뭘 보고?”

 “그렇게 발 맞춰 걸어가 주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겐 큰 힘이 된다고.”

 “경험담 같은 걸?”

 

 라크가 멋쩍은 듯 볼을 붉히며 답했다. 로잘린은 이제 훌쩍 커버린 제 의동생의 더벅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경험담이지, 그럼. 이 누님은 내 앞에 아무도 없나 고민한 적도 있었는걸.”

 “그거 마탑의 마법사들이 들으면 울겠어.”

 “어쩌겠니? 내가 이렇게 잘난 천재인데. 여튼, 대부분은 욕심이 앞서서 자기부터 먼저 달려 나가 버리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너는 곁에서 같이 가잖아. 그게 가장 대단한 거지.”

 “그런가?”

 “그렇지. 그리고 느린 게 나쁜 것도 아니야. 전에 최한도 그렇게 말해줬잖아. 대기만성, 알지? 언젠가 먼 미래에 내가 널 보고 부러워할지 어떻게 알아?”

 “에이, 그건 좀.”

 “뭐야, 누나 말 못 믿니?”

 “현실감이 없는걸.”

 “나중에 네가 어떻게 말할지가 기대되네.”

 

 라크는 그저 말갛게 웃었다. 발걸음은 여전히 나란했으나 이전보다도 조금 느렸다. 느릿하게 툭, 툭 계단을 굴러 내려오는 발소리가 퍽 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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