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최한
with 위그 @btyrlit
찬란한 햇살이 흩날리는 꽃잎과 함께 광장 곳곳에 내려앉았다. 인산인해를 이룬 왕국민들은 엄숙하면서도 어딘가 들뜬 얼굴로 저마다 손에 쥔 것들을 열성적으로 흔들었다. 수많은 시선이 한데 모인 곳에는 태양빛을 받아 더 화사하게 빛나는 왕세자 알베르 크로스만과, 마치 별의 그림자로 빚은 칼처럼 굳건히 서 있는 영웅 최한이 있었다.
“올해로 3년째군. 그런데도 스승님은 어째 영 익숙해지질 않아?”
우아하게 손을 흔들어 환호에 화답하면서 알베르는 최한에게 짓궂게 속삭였다. 최한도 따라서 제 이름을 연호하는 이들에게 손을 흔들었지만 끝에 어쩔 수 없는 어색함이 묻어났다. 그럼에도 최한은 태연하게 답했다.
“저하께서 익숙하시니 저 한 명쯤이야 덜 익숙해도 되겠지요.”
“빠져나가는 건 아주 익숙해졌어. 왕궁의 능구렁이들 못지않아.”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하는 말에도 최한의 낯빛은 한 점도 변하지 않았고, 알베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픽 웃어넘겼다. 바람을 타고 온 꽃잎이 새하얀 장갑 위에 톡 떨어졌다. 각양각색의 잎들 중 하필 묻은 것이 붉어서, 알베르는 다른 잎들처럼 무심히 털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최한 역시 자신의 예복 위에 쌓인 붉은 꽃잎을 내버려두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케일 님이 끝나고 다 같이 밥이나 먹자고 하셨습니다.”
“그래? 그 짱돌저택에서?”
“아뇨. 왕궁에서요.”
“……로운 왕궁이겠지?”
“다른 왕궁도 갖고 계십니까?”
“이것 봐. 능구렁이 다 됐다니까.”
한 마디씩 주고받는 모습은 퍽 자연스럽고 가까워서, 광장에 모인 이들 중 누구도 그들의 사제관계가 보여주기 식으로 시작되었다는 걸 여태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이제 꽤나 닮은 표정을 지을 줄 알게 된 둘은 각자 다른 곳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도 같은 감회에 젖고 있었다. 매년 이 자리에 설 때면 겪는, 무척 새삼스러우면서도 꾸준한 감각이었다.
최후의 전쟁이 끝난 지도, 그 전쟁의 뒷수습까지 마무리한 지도 한참이 더 지났다. 그럼에도 문득문득 그 순간들을 떠올리는 때가 어쩔 수 없이 있었다. 작게는 피처럼 붉은 것을 마주하는 때부터 크게는 왕궁 마법사들의 훈련으로 은빛의 실드가 넓게 펼쳐질 때, 비가 쏟아지는 날 벼락이 칠 때. …그리고 이렇게 잃은 것들을 공식적으로 기억하는 자리에 섰을 때. 그럴 때마다 처참히 붉어지는 기억들이 가슴을 선뜩하게 만들고, 반사적으로 짙은 절망과 아픈 상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쓰러지는 붉은 머리카락의 청년이 선명해질 때면 두 사람은 더없이 안전하던 세상이 완전히 무너지는 듯 아찔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래도 이렇게 단단하게 버티고 설 수 있는 것은 더는 그것이 현실이 아니며, 더는 홀로 그 모든 것을 감당하지 않아도 됨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것도 손에 쥔 것 없이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이어가던 1왕자나,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로 낯선 세계에 뚝 떨어져 생사를 무수히 넘나들던 열일곱의 고등학생도. 이제는 손에 쥘 것도, 손을 잡아줄 이도 넘치도록 많았다. 오늘처럼 작은 흔적으로 시작된 상념이 끝없이 뻗어가 어느 붉디붉은 아픈 날에 닿더라도, 이제는 괜찮으리란 것을 안다. 설령 그런 날이 다시 찾아온다 해도 그들은 한 번 겪어본 것을 쉬이 잊는 부류가 아니니 두 번째는 더 이겨내기 쉬울 것이다. 아무도 없던 옆을 기꺼이 채워줄 동료가 곁에 있다면.
함께 지켜낸 세상에서 맞는 세 번째 봄에, 따뜻한 온기로 날카롭게 벼린 각오가 칼끝처럼, 혹은 창끝처럼 번뜩였다. 화사한 미소와 단정한 미소는 처음과 같이 여전히 단단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영영 그렇게 부서지지 않을 것처럼. 혹 부서진다 해도, 언제든 다시 이어붙일 수 있을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