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란가
론 / 비크로스
with 류난 @707_1108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마저도 들킬까 두려워 호흡마저도 조용하게 다스리며 기척을 죽이고 숨을 참았다. 자신들을 뒤쫓던 이들의 숨소리가 근처를 지나 거리가 멀어지고, 한참의 정적이 감돈 뒤에야 겨우 작은 한숨을 조금 내쉴 수 있었다. 론의 품 안에 작은 아이가 론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숨을 참고 있었다. 론이 비크로스의 등을 토닥이자, 그제야 엄마... 하는 울음 섞인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 * *
어두운 밤, 얼굴을 가리는 깊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거리를 돌아다니다 자신과 똑같이 맞춰 걷는 소리를 들었다. 잠깐 멈추어 주변을 구경하다가 인파에 휩쓸려 자신 또한 발소리를 숨겼다. 자신을 쫓던 발소리가 근처까지 왔다가 쯧. 하는 혀 차는 소리와 함께 다시 멀어졌다. 점점 멀어지는 기척에 신경을 세우다가 완전히 멀어지자 그대로 걷던 방향을 되돌려 모습을 숨긴 채로 여관으로 돌아왔다. 여관을 빠져나올 때 열어둔 창문을 통해서 방안으로 조심히 되돌아가자 방안은 달빛만 가득할 뿐 비크로스는 고용하게 잠들어 있었다. 아이의 무사함을 확인하고는 창문을 닫고 로브를 벗었다. 달빛이 창문을 투과해 비크로스의 얼굴에 내려앉는 것들 보다가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작은 아이를 보면서 몇 번을 발길을 멈췄다. 집으로 돌아가서, 죽더라도 그곳에서 싸우다 마지막을 하고 싶은 마음을 이 작은 아이 하나만을 보고 멈춰 세우고, 다시 도망쳤다.
‘여기는 제가 맡을게요. 비크로스를 부탁해요.’
대검을 휘두르며 자신의 뒤를 막으며 말하는 그 부탁 어린 당부에 몇 번이고 멈추려던 발을 끌고 사랑하는 이를 집과 함께 남겨두고 그 자리를 떠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뒤를 쫓아오는 기척을 몇 번이고 떨쳐내며, 미련도 다잡았다. 론의 발걸음을 이끌어 준 건 품 안에서 숨을 참고 있는 어린 비크로스였다.
비크로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다가 앞으로의 일정을 생각했다. 벌써 이번 주만 해도 세 번째, 자신을 뒤쫓은 이들을 떼어놓으며 마을을 옮겼다. 이제 슬슬 서 대륙을 떠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계속 주변의 마을을 여러 곳 떠돌았지만, 어떻게 아는 것인지 계속해서 흔적을 따라왔다. 이제 정말 떠날 때가 왔다
“일단 살아야지. 나중에 꼭 돌아오자꾸나.”
돌아오자. 꼭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자. 그것만을 몇 번이고 다짐하며 비크로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날 새벽 론 몰란과 비크로스 몰란은 서 대륙을 떠났다.
동대륙으로 넘어온 이후 론은 자신의 모든 흔적을 숨겼다. 남의 아래에서 일하면서 평범을 가장했다. 누군가의 아래에서 잡일을 하거나 먼 거리를 다녀와야 하는 심부름을 하고 얼마 안 되는 푼돈을 받았다. 그러다가도 달이 어둠을 밝히는 밤이면 잠이 든 비크로스를 두고 홀로 산에 올랐다. 손에 쥔 단도를 수십 수백 번을 내려그으며 손에 가죽이 벗겨질 정도로 휘두르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렇게 밤을 보내고 내려온 날이면, 론에게서는 지독할 만큼 독한 피 냄새가 났다.
그런 나날이 이어지던 날. 유난히 밝은 달빛이 내려앉은 날 또다시 집을 나서려는 론을 붙잡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잠에서 깬 아들을 보다가 론은 아무렇지 않게 태도를 취했다.
“더 자거라. 아직 밤이 깊다.”
“저도 따라가고 싶습니다.”
비크로스가 말했다.
“저도 몰란입니다. 저도 아버지를 따라가고 싶어요.”
품 안에서 울며 아무것도 못 했던 아이가 그리 말했다. 자신도 몰란이라는 말에 론이 웃었다.
“그리 만만하진 않을 거다.”
그날 숲에서는 하나의 휘두르는 소리가 아닌 두 개의 맞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비크로스가 자랄수록 론의 삶은 평범하게 안정되어갔다. 낮에는 평범하게 일하고, 밤에는 비크로스와 종종 토끼를 잡았다. 일정 주기를 두고 직장도 집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지냈다. 그러다가 ‘헤니투스 백작가’ 에서 시종들을 구한다는 말을 보았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라는 말이 떠올랐다. 시끄러운 곳에 숨어야 더 찾기 어렵다는 말들이 떠올라 지원했다. 문제가 생긴다면 또 자리를 옮기면 될 일이었다. 론이 지원했고, 비크로스가 지원했다. 어린아이를 돌볼 줄 안다는 이야기에 론은 케일과 만나게 되었다.
“안녕하십니까. 도련님. 저는 론 이라고 합니다.”
붉은 머리의 어린 도련님은 백작의 뒤에서 고개만 내밀려 론을 쳐다보았다. 앞으로는 론이 케일의 전담을 맡게 될 거라는 말에 제 아버지의 손에 밀려 쭈뼛거리며 앞에 섰다.
“헤니투스 백작가의 장남. 케일 헤니투스입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어른스럽고 똑 부러진 인사를 받고 론은 인자하게 미소지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케일 도련님.”
그곳에서 그저 흥미로운 어린 도련님을 만났다.
* * *
케일은 론의 말을 잘 들었다. 그래서일까. 그런 아이를 챙겨주다가 떠나지 못하고 그곳 한자리에서 1년, 2년을 거쳐 5년이 되고, 10년이 넘게 그 한자리에 있었다. 그때까지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10년이 때부터는 이제는 늙어버린 이 몸의 한낱 욕심일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 더더욱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 나날의 끝에 잊지 못한 흔적을 보게 되었다.
집을 뺏기고, 터전을 빼앗은 그들의 흔적을 다시 보게 되었을 때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알았다. 한낱 보잘것없는 욕심이라 할지라도 이제는 그곳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직 기간은 1년이야. 잘 갔다 와.”
기껏 부린 욕심에 마냥 어리다고 생각했던 도련님이 이런 소리를 했다. 그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음 날 새벽 자리를 떠났다.
오랜만에 몸을 움직이고, 흔적을 쫓고, 기척을 숨기며 전투를 했다. 상처가 쌓이고, 피를 흘렸다. 그럼에도 죽음이 아닌 살아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이 오만이었을까. 한참을 싸우다 돌연 눈앞이 까매지며, 독이 몸속에 스며들었다. 그것을 알게 되자마자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 집을 떠나온 이후 평생을 그랬듯이 기척을 숨겼다. 또다시 그렇게 살아남았다.
어째서 죽지 않았을까 생각하다가 돌아오라 했던 케일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래서 집으로 향했다. 죽더라도 자신의 아이 곁에서 그리고 집에서 죽고 싶다는 다른 욕심이 생겼다. 그렇게 죽음을 각오하고 찾아갔을 때 우습게도 살아남았다. 이번에는 정말 죽을 거라 생각하였던 게 우습게도 케일은 자신을 살려냈다.
그때부터는 케일의 곁을 지켰다. 어떤 의미로는 두 번씩이나 자신에게 숨을 불어넣어 줬으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케일은 그런 론과 비크로스에게 하나씩 돌려주었다.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듯 그렇게 돌려주었다. 그저 어리디 어린 강아지 같다고 생각했던 어린아이가 어느덧 자신의 앞에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서 대륙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고, 그곳에서 이름을 찾았다. 그리고 집을 보았다. 십오 년이 지났음에도 잊지 못한 그 집을 다시 보았다. 자신은 살아있었다. 죽어서나 갈 수 있으면 다행이라 여겼던 그곳이 자신의 눈앞에 있었고, 그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비크로스가 대검을 뽑아 들고 검을 휘두르며 앞을 막아선 존재를 향해 겨눴다. 이 집을 떠나올 때 자신의 등 뒤에서 그리했던 이가 떠올랐다. 먼 길을 돌아 다시 이곳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왔네요.”
“…그래. 돌아왔구나.”
드디어.
드디어 집에 돌아왔다.
우리 집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