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하벤&올리엔
with 카네포라 @C4N3PH0R4
푸른 녹음을 그린다. 우거진 나무, 레어의 안쪽까지 드는지 마는지 굳이 생각지도 않는 햇살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 걸 단 한 차례도 가늠한 적 없었으니 아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고. 새들은 노래하고, 바람이 불지 않을 사이에서 뺨이 느른하게 간질여졌다. 의문과 같은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언젠가의 추억은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다. 너머로 나설 수도 없으며, 그릴 수도 없다는 것이.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선명하다면, 아무리 생경한 것이라 한들 조금 정도는 낫지 않겠느냐고. 안일한 것이 분명할 생각을 하지만 그마저도 그뿐이다. 저도 모르게 내리감은 눈이 비스듬하니 기운 채로 뜨여졌다. 에르하벤은 조금 흐트러진 제 머리카락을 가벼이 정리해냈다. 너머에 있는 이는 여상한 존재일 터였다. 언제나와 다를 바 없는 맹랑하기 그지없는, 아이 중 하나. 언젠가 작은 묘목에서부터 드리운 나무를 보게 된다면 이러한 기분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했던 이를 바라보는 금안은 조금은 차분했고, 동시에 여전했다.
“뭐야, 에르하벤.”
왜 그렇게 쳐다봐? 내 얼굴에 뭐 묻어서 이러나. 스윽, 슥, 옷소매로 대충 뺨을 문질러보다가도 머리 위에 올라간 다람쥐 한 마리는 안락하다는 양 그 위에서 가만히 고개를 기울였다. 늘어진 갈색 로브의 끄트머리가 팔락거렸다. 익숙한 것들은 간혹 평온을 부른다고, 지금의 그가 제 아이들이라 부르는 용을. 인간을 바라보듯. 언젠가의 에르하벤은 가장 익숙한 아이로 저 녹음을 드리운 용을 꼽을 수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엥, 별일이네. 난 또 당연히 그런 줄?”
그러지 않고서야 뭘 그렇게 가만히 보고 있겠어, 당신이? 오만한 용답게도 하는 말은 마치 고개를 치켜들고도 하는 말 같았다. 저 조막만 한 먼지 뭉텅이 같은 게 어찌나 잘 크던지. 한때 유난히도 날렸다던 싸움꾼은 조금의 시간이 지나 스스로를 어른이라 규정하며 철이 없던 시기를 뒤로하며 손을 뻗기 시작했다. 자신이 타고 난 속성에 구애 받지 않고도 그가 충분히 강한 용이며, 고룡이라 불릴 수 있는 건 아마도 그런 이유였으니 더더욱. 사교적인 용은 그만한 오만함을 품고, 손을 뻗었다.
바람이 살랑거렸다. 모든 것이 푸르른 녹음을 닮아, 여기저기 걸음을 두는 발밑이 잔디가 드리워진 채로 걸음 소리마저 사박이며 삼켜냈다. 흔적이 남지 않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마치 기억을 더듬을 적과도 같았다. 흔적이 남는 건 과거가 아니었다. 현재이지. 과거를 더듬었노라 하는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있을 뿐. 머리 위에서 흔들리던 다람쥐는 쫄래쫄래 바닥으로 내려와 에르하벤의 발치를 맴돌았다. 걷는 걸음 하나하나에 순환이 보였다. 싹이 움터, 묘목이 되고, 나무가 된 후에는. 언젠가 눈을 감는 것.
인간도 그러했고, 엘프도 그러했으며, 자연스러운 돌아감을 둘 적의 용 역시 그러했다. 그러나 아니지 않았나. 부자연을 목도했던 이는 그저 쓴맛을 한 입 삼켜냈다. 오늘따라 말이 없네, 당신. 말이 귀찮을 나이도 아니잖아. 너무 늙은 척하는 거 아냐? 나 참. 선선한 목소리는 저 멀리에 있음에도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바람을 일으켰다. 그는 이게 넘실거리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거 같았다.
“에르하벤. 당신은―”
아, 사실 용의 오만함은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사전적인 의미를 고스란히 떠올리는 이가 있는가 하면, 손을 뻗은 만큼 책임을 질 수 있노라 생각하는 것 역시 오만이라고. 그의 아이, 금색 용의 아이였으며 한 대륙에서 고룡이라 불렸던 녹색의 용. 올리엔은 생각했다. 가지런한 시선에 픽, 웃어버리며 고개를 돌려 마주했다. 묵음처럼 넘실거리는 목소리에는 분명 웃음기가 드리워져 있었다. 나이를 먹더라도 아이 같은 구석이 남는 건 천성이 한참의 여름을 닮아 그렇지 않을까. 그러나 돌연 내리 앉은 겨울이 그의 앞에 있었던 것을 떠올린다. 그가 숨을 내쉬면 비로소 적막이었다. 멀지 않으나, 멀어진 것들을 손끝으로 더듬는다 한들 나뭇가지 사이로 타고 드는 그림자는 여전했다. 숨을 한 번 골라내고, 에르하벤은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