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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일 헤니투스

with 파란 @vlue_wave

삶은 바다와 같아서

 문득 바다가 보였다. 지독하리만치 새카만 해수면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어 바라본 하늘은 그보다 더 검었다. 꿈을 꾸듯 혼몽한 눈동자에 차츰 현실이 담겨든다. 그제야 겁이 났다.

 공포감에 손을 휘저으며 허공을 더듬길 반복했다. 오로지 바람만이 절박한 손짓에 감겨들었다. 그리던 온기는 머나먼 북풍을 타고 사라진지 오래였다. 다사로이 비치는 햇살은 한순간에 과거가 되었다. 그저 바다만이 현재로서 존재했다.

 황망히 손을 내려다보았다. 양손 가득 쥐어도 한 모금의 물 정도만 간신히 담을 수 있는 자그마한 손이 보인다. 한없이 여리고 약한 어린 아이의 것이다. 소년의 경계에 채 진입하지 못한 아이는 남겨진 해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리도 팔도 손만큼 작았다. 혼자서는 떠날 수 없었다.

 

* * *

 

 시간은 하릴없이 흘러갔다. 어두운 밤 또한 계속되었다. 바다에 홀로 남겨진 아이는 줄곧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매서운 바람을 견디며 돌아오지 않을 온기를 추억했다.

 그와 별개로 바다는 쌓이는 세월만큼 점점 더 깊어져 갔다. 바다는 오래지 않아 거친 해류를 품었고, 해류는 다시 거센 파도를 낳았다. 슬쩍슬쩍 밀려들던 파도는 몇 번 간을 보더니 대번에 크기를 불렸다. 검은 너울이 해변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파도가 부서지며 만들어낸 파편이 몇 번이고 약한 몸에 상처를 냈다. 처음에는 울었으나 그 뒤로는 울지 않았다. 눈물조차 아픔이 되었다. 고통은 오롯이 본인의 몫이었기에 아이는 무던히 견뎠다.

 그럼에도 파도는 쉼 없이 밀려들었다. 종래에는 주위에 있던 모든 것들이 동참했다. 소년이 된 아이는 하는 수 없이 해변을 떠나 걷기 시작했다.

 훤히 드러난 발에는 연신 모래가 밟혔다. 고운 입자 속에 이따금씩 모난 조각이 존재했는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자잘한 상처를 냈다. 긁힌 흔적은 오래지 않아 대부분 사라졌으나 간혹 짙은 상흔이 남았다. 새 살이 돋아도 흉터는 지워지지 않는다. 이따금씩 상처를 들여다 볼 때면 괜히 쓰라렸다. 걷는데 지장을 줄 정도의 통증도 있었다. 그래도 쉼 없이 걸었다. 한 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어김없이 파도가 쳤다.

 

* * *

 

 그러던 어느 날 다시 북풍이 찾아들었다. 매서운 바람이 볼을 할퀴고 지나갔다. 근래에 제법 고요했던 바다에 매서움이 더해졌다. 파도가 끝을 모르고 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하늘에 도달한 물결이 빠른 속도로 추락했다. 바다가 땅을 삼키면서, 이제껏 경험해본 적 없는 재앙이 일어났다.

 육지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끌려갔다. 얼마 전 무사히 성년이 된 소년 또한 함께 휩쓸렸다. 아래로, 또 아래로. 깊이, 더 깊이. 해류가 소년의 발을 잡아끌었다.

 그렇게 도달한 심해는 지옥이었다. 심해에서는 들이쉬고 내쉬는 모든 행위가 억제되었다. 어쩌다 숨을 삼키기라도 하면 바닷물이 폐부에 들어찼다. 한 때 가장 쉬웠던 행위가 가장 어려워졌다. 함께 끌려온 뭍의 생명체들은 고초를 이기지 못하고 대부분 숨을 잃었다. 소년은 안간힘을 다해 버텼다. 다시 땅을 밟고 싶었다. 잠겨있던 모든 순간마다 별이 들지 않는 오랜 밤이 그리웠다. 그곳에서는 적어도, 숨은 쉴 수 있었다.

 

* * *

 

 가라앉아 있던 청년을 건져낸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었다. 수몰되었던 여러 생명들 중, 힘을 얻은 몇몇이 손을 내밀었다. 그는 기꺼이 손을 잡았다.

 

* * *

 

 도움을 받아 올라온 세상은 나아가야할 길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이제까지 경험한 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살아남은 이들이 서로의 별이 되었다. 그들은 긁히고 패여 엉망인 손에 온기를 불어넣고, 새로운 항로를 선사하는 나침반이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새로운 가족이 생겼으니까.

 

* * *

 

 그러나 삶은 바다와 같아서 쉬이 부서지고 흩어지고 만다. 저 멀리 북녘에서 세 번째 바람이 불어왔다. 거센 파도가 몇 번이고 남자를 붙들었다.  그때마다 누군가 길을 바로잡아 주었다. 힘겹게 뒤를 돌아보면 그때마다 번번이 파도가 누군가를 삼킨 후였다. 폭풍우가 유난히 심하게 불었던 밤, 그의 세상은 또다시 검게 물들었다.

 다음 날, 해수면에 수많은 죽음이 떠올랐다. 그 속에서 나는 홀로 살아남아 숨을 내쉬었다. 호흡기가 따끔거리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선명한 기억은 거센 파도가 되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눈앞의 바다는 배부른 식사를 마치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온하다. 토해내는 감정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삼켜버린다. 나는 잠시 먼 수평선을 바라보다 멀어졌다. 여전히 파도가 쳤다.

 그러나 걸어도, 걸어도 상실은 선명했다. 왜 그리 떨쳐내기 힘든지 한동안 걷는 내내 숨이 가빴다. 그리고 그럼에도 익숙해지는 게 사람이다. 살다 보면 또 어떻게든 살아진다. 찌릿한 통증은 세월의 유수에 빛을 바랬다. 그리하여 어느덧 일상이 되었다.

 

* * *

 

 암갈색 눈동자가 평온을 가장해 바다를 바라보기 시작할 때쯤, 새로운 바람이 불어들었다.

 

 “케일님.”

 “케일!”

 “인간아!”

 

 묘하게 익숙하고 그리운 내음이 공기 중에 만연한 짠 내를 몰아낸다. 흐려져 가던 눈에 생기가 더해진다.

 

 “동생.”

 “케일 공자.”

 

 바람은 쉬지 않고 계속해서 불었다. 청량한 공기의 흐름은 달빛을 가리고 있던 구름마저 드러냈다. 그 속에 갇혀있던 별이 비로소 온전한 빛을 발한다. 제 모습을 찾은 달과 별은 뒤이어 바다를 밀어내고, 가라앉아 있던 태양을 잡아 당겼다. 물과 하늘이 맞닿아 이룬 경계가 점차 희미해져 간다. 새벽 여명이 조금씩, 조금씩 바다에 스며들었다. 마침내 온전한 빛이 도래하고, 영원의 밤은 끝내 종막을 맞이했다.

 

 “하하.”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는 과정에서 그 누가 후련히 웃지 않을 수 있을까.

 입 꼬리가 유려한 선을 그리며 시원하게 올라간다. 꽁꽁 묻어두었던 지난 아픔도 투명한 눈물이 되어 뚝뚝 볼을 따라 흘러내렸다. 케일은 개운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짙은 초목과 부드러이 흐르는 바람결이 보였다. 그 너머에 모든 이야기를 끝마친 케일을 기다리며 그들이 서있었다. 케일은 바다를 떠나 한 발 한 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꼭 백수해라.’

 

 바다에서 불어온 오랜 바람이 마른 등에 힘을 실어주었다. 툭. 맺혀있던 눈물이 마른 모래사장을 적신다. 짙은 후회를 한 방울의 눈물에 실어 보낸 케일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오래 지나지 않아 바다를 벗어났다. 흐르는 모래를 디디고 잔디를 밟아 마침내 숲에 도달했다. 숲 너머에서 한낮의 빛이 새어 들었다. 케일은 눈을 감았다 뜨고는 마른 입을 열었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입니다, 케일님.”

 “좋은 아침이라는 건데!”

 “아니라는 건데! 벌써 해가 중천이라는 건데!”

 “인간아! 왕세자가 통신구에서 불내고 있다! 얼른 일어나라!”

 

 시끌벅적한 어느 낮, 기나긴 이야기는 마침내 끝을 맞이했고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끝은 케일 자신에게 분명 해피엔딩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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